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이라는 이중 구조적 압력 속에서 한국 사회는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있는 영역이 바로 지방 대학입니다. 한때 지역 균형 발전의 거점으로 설계된 지방 대학들은 오늘날 심각한 정원 미달, 재정 악화, 교육 경쟁력 저하로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단지 교육기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경제, 인구 분포, 국가 경쟁력 전체에 직결된 중대한 사안입니다. 본 글에서는 인구 소멸과 지방 대학의 붕괴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서울권 대학 집중 현상이 이 구조를 어떻게 강화시키고 있는지 분석하고, 국내외 사례와 정책 대안을 통해 실질적 해법을 모색합니다.
1. 인구소멸의 충격: 지방대학 붕괴의 본질은 인구의 문제다
지방 소멸 지수, 대학 생존과 직결된다
행정안전부의 '지방소멸지수'는 한 지역의 청년층(20~39세 여성) 비중을 중심으로 산출됩니다. 이 지수가 0.5 미만인 경우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는데, 2024년 기준 전국 228개 시군구 중 120곳 이상이 이 기준에 해당합니다. 이 가운데 강원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등의 중소도시는 소멸 고위험군으로 나타났으며, 이 지역에 위치한 대학 대부분이 정원 미달로 인한 폐지 또는 통폐합 논의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방 소멸은 곧 대학의 소멸입니다. 대학의 존재 자체가 젊은 인구 기반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지역의 청년 인구가 줄어들면 학령인구 역시 함께 줄고, 이는 곧 대학의 생존 위협으로 이어집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까지 고등학교 졸업자 수는 40만 명 이하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현재 대학 입학 정원의 절반 이상이 채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청년 인구의 수도권 유출은 더 이상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많은 지방 청년들은 대학 진학, 취업, 결혼, 출산 등의 라이프사이클 전체를 수도권에서 해결합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방 고등학생의 65% 이상이 수도권 대학 진학을 희망하며, 졸업 이후에도 지역으로 복귀하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지방은 청년 없는 교육 기관, 일자리 없는 도시, 소비 없는 사회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으며, 대학은 그 붕괴의 서막이자 상징적인 징표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2. 서울 중심 대학 경쟁의 심화: 구조적 불균형의 고착
수도권 대학 집중 현상은 정책에 기인한다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들은 명문대라는 브랜드 파워뿐 아니라, 국가 재정, 산업계 연계, 연구개발 인프라 측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육부, 과기부, 산업부의 다양한 연구지원 및 사업에 우선순위로 배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지역 대학은 같은 과제를 두고 경쟁하기조차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런 현상은 과거 노무현 정부 당시 시도된 '지방균형발전' 정책이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정권 교체와 함께 중단 또는 축소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반면 서울권 대학들은 오히려 캠퍼스 확장, 인재 집중, 산학 클러스터 연계 등을 통해 교육 생태계 내 복합 지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방 대학으로선 넘을 수 없는 격차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입시 경쟁이 아닌 전방위적 자원 쏠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뿐 아니라 서강대, 이화여대, 홍익대, 경희대, 성균관대 등 주요 서울권 대학들은 단순히 입시에서의 경쟁력이 아닌, 기업 연계 프로젝트, 국가 연구비, 창업지원, 해외교류, 교수진 역량 등 모든 측면에서 지방 대학보다 월등합니다. 특히 수도권 대학들은 다양한 장학금 제도와 기숙사 확충으로 지방 학생들을 적극 유치하며, 지방 대학의 기반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지방의 고등교육기관이 수도권의 보완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지방에 남는 학생들은 수도권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이들로 인식되며, 대학 자체의 위상도 하락하는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3. 산업과 지역의 연결고리: 지방 대학이 살아야 지역이 산다
대학 없는 지역은 산업도 없다
대학은 단순한 교육 기관을 넘어 지역 경제, 문화, 일자리 창출의 중심입니다. 대학 캠퍼스는 수천 명의 학생과 교직원이 존재하며, 지역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고 지역 기업과 협력해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이 문을 닫으면 지역 경제는 급속히 위축됩니다. 실제로 경남 소재 A대학이 폐교된 이후, 해당 지역의 상가 공실률이 30% 이상 증가했고, 자취방 가격은 반 토막 났습니다.
특성화 전략이 필요한 시점
지방 대학은 더 이상 서울권 대학을 모방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지역의 산업 구조에 맞춘 전문성 기반의 학문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남의 목포해양대학교는 해운·조선 산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강원대는 산림자원, 축산업 등과 연계한 프로그램으로 지역 기반 특성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화는 지역 중소기업과 연계한 실무형 교육, 지역 공공기관과의 인턴십 협력, 지자체 주도의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과 결합될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대학의 생존을 넘어 지역 사회의 지속가능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4. 정책과 거버넌스: 위기를 넘어 구조 혁신으로
정부 지원 방식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현재 정부의 대학 지원 정책은 대부분 일률적 평가 시스템과 수도권 중심형 설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방 대학은 우수 인재 유치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대학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받고, 낮은 성과로 인해 더 적은 지원을 받는 구조입니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지방 대학 전용 평가 기준과 정량 평가가 아닌 정성 평가 중심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글로벌 사례에서 배울 점
일본은 지방대학을 ‘지역중심거점대학’으로 지정해 국가 재정을 장기적으로 지원하고, 지역 산업과의 협력을 제도화했습니다. 예를 들어 오이타대학은 지역 온천 산업과 연결된 생명공학 연구소를 설립해 지역경제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핀란드는 ‘폴리테크닉’ 시스템을 통해 지방에 위치한 고등교육기관들이 현장 실습 중심의 커리큘럼을 제공하며, 지역 기업에 즉시 투입 가능한 실무형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단순한 학문 중심 대학이 아닌, 지역 중심 융합형 고등교육기관으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대학-지자체-기업 연계형 거버넌스
실효성 있는 대안은 대학 혼자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지자체와의 공동 재정 운영, 기업과의 맞춤형 인력 양성 계약, 주민 참여 프로그램 등 다각적인 연계 체계가 필요합니다. 충청남도는 도 단위로 ‘대학협력사업단’을 운영하며, 지역 내 6개 대학과 공동 커리큘럼, 연구소, 창업지원센터를 운영 중입니다. 이는 정책 실험이지만 충분히 확장 가능성이 있는 모델입니다.
결론: 지방 대학은 국가 균형발전의 최후 보루다
한국의 인구 구조 변화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하지만 그 여파를 완화하고, 새로운 균형을 찾아가는 일은 지금도 가능합니다. 그 시작은 지방 대학을 살리는 일입니다. 대학은 단지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젊은 인재를 붙잡아두는 지식의 기반이자 사회적 인프라입니다.
서울권 대학의 경쟁 심화는 이미 지방을 배제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로 고착되고 있습니다. 지방대학을 단순히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역 혁신의 플랫폼으로 ‘재설계’하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정부, 지자체, 산업계, 그리고 대학 스스로가 10년 후를 내다보는 공동의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수치 중심의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대학의 성격과 기능, 지역과의 연계성, 장기적 교육 철학에 기반한 새로운 고등교육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지방 대학이 살아야 지역이 살고,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